누전차단기(ELB)가 전국 모든 건물에 100% 보급된 대한민국에서 전기화재가 줄어들지 않는 이유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전기화재의 진짜 주범은 누전이 아니라 아크(Arc, 스파크)라는 사실이 통계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기존 차단기 체계가 아크를 감지하는 기능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아크차단기(AFCI·Arc Fault Circuit Interrupter)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전기안전공사의 통계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 전체 화재 3만 7610건 중 전기적 요인에 의한 화재는 8634건으로 전체의 22.9%를 차지했다. 이로 인한 재산피해는 1701억 원에 달하며, 감전 사상자도 371명에 이른다. 국내에서는 매년 7000~9000건의 전기화재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어, 누전차단기 보급만으로는 전기화재를 막을 수 없다는 현실이 수치로 드러난다.

아크 발화 82.8%…누전차단기는 아크를 차단 못 한다

한국전기안전공사 재해통계에 따르면, 2024년 전기화재 발생 원인 중 누전에 의한 발화는 단 2.9%에 불과하다. 반면 아크에 의한 발화는 전체 전기화재 8802건 중 7291건으로 82.8%에서 많게는 88%를 점유한다. 전선 손상, 멀티탭 꺾임, 콘센트 접속 불량, 설비 노후화 등으로 미세한 스파크가 발생하는 순간 아크는 순식간에 고열의 불꽃으로 발달한다. 기존 누전차단기(ELB)와 배선용차단기(MCCB)는 인체 감전 예방 및 과전류 차단을 목적으로 40여 년 전에 개발된 기계적 장치로, 유해 아크를 감지하고 차단하는 기능이 전혀 없다. 결국 수많은 건물과 산업 현장이 전기화재의 진짜 원인인 아크에 대해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는 셈이다.

연성대 전기공학과 김홍용 교수(공학박사)는 전기신문 기고를 통해 이 같은 ‘전기안전 착시’ 현상을 지적하며, 마이크로프로세서 기반으로 전기 파형을 실시간 감시하고 유해 아크 발생 시 즉시 전원을 차단하는 아크차단기(AFCI)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and Technology)의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전기 선로에서 아크가 발생한 후 이를 차단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불과 40초 만에 방 하나 전체가 전소되는 ‘플래시오버(Flashover)’ 현상이 일어난다. 골든타임은 단 40초에 불과하다.

방화셔터·방화문 업계에도 직결되는 아크 화재 대응 과제

아크 화재 문제는 방화셔터·방화문 등 건축 방화설비 업계와도 직결된다. 전기화재의 대부분이 아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화재 초기 감지와 차단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방화구획 설비가 작동해야 하는 상황이 그만큼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방화셔터와 방화문은 화재가 이미 확산된 이후 구획을 차단하는 최후 방어선 역할을 하지만, 아크 화재처럼 발화 속도가 극히 빠른 경우에는 설비가 작동하기 전에 이미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아크차단기(AFCI) 도입을 통한 발화 원천 차단이 방화설비의 실효성을 높이는 선결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건축물 전기 설비 기준과 화재안전기준(NFSC) 간의 연계 강화, 그리고 노후 건물을 중심으로 한 아크차단기 의무화 논의가 업계 전반에서 본격화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은 이미 NFPA(미국화재예방협회·National Fire Protection Association) 70 기준을 통해 신축 주거용 건물에 AFCI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관련 기준 마련과 제도적 뒷받침이 시급하다는 전문가 의견이 잇따르고 있어, 향후 전기설비 기준 개정 논의에서 아크차단기 도입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다뤄질 전망이다.

출처: 전기신문, 셔터뉴스 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