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있는데 기준이 없다”… 신제품 앞에 놓였던 보이지 않는 벽

화재안전에 직결되는 건축자재는 방화문, 자동방화셔터, 내화구조, 내화채움구조, 복합자재 등 5개 품목이 품질인정 대상으로 관리된다. 그런데 현행 규칙 제27조는 성능기준을 판단하기 어려운 신개발품이나 규격 이외 제품에 대해 자문위원회 심의를 거쳐 별도 기준을 정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그 적용 범위를 사실상 내화구조의 성능인정에 국한해 왔다. 나머지 4개 품목은 아무리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해도 성능을 검증할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인정 신청조차 할 수 없는 구조였다.

방화셔터 업계에서는 이 벽에 막혀 좌초한 기술이 적지 않다. 기존 고시 기준은 표준적인 슬랫형·스크린형 셔터를 전제로 설계돼 있어, 신소재 셔터커튼이나 새로운 구동 방식, 이형(異形) 구조처럼 기준의 틀을 벗어나는 제품은 성능이 아무리 우수해도 제도권 진입로가 없었다. 국토부 역시 이번 입법예고 보도자료에서 나머지 4개 품목은 “기술을 새로 개발하더라도 성능을 검증할 명확한 기준이 없어 현장 도입이 어려웠다”고 문제를 인정했다.

제27조 전면 손질… ‘성능인정’에서 ‘성능인정 및 품질인정’으로

개정안은 제27조의 적용 근거에 품질인정 규정인 제24조의7을 추가하고, 조문 전반의 ‘성능인정’을 ‘성능인정 및 품질인정’으로, ‘성능’을 ‘성능 및 품질’로 확대했다. 문구 몇 개를 바꾼 것처럼 보이지만 효과는 구조적이다. 이로써 한국건설기술연구원장은 자동방화셔터를 비롯한 4개 품목의 신제품에 대해서도 전문가 자문위원회 심의를 거쳐 기존 인정기준과 다른 맞춤형 기준을 수립하고, 이를 근거로 품질인정을 내줄 수 있게 된다.

인정 기준과 절차, 자문위원회 운영에 관한 구체적 사항은 한국건설기술연구원장이 정하도록 위임돼 있어, 규칙 개정 이후 건설연의 후속 지침이 제도의 실질을 좌우하게 된다. 심의 신청 요건과 소요 기간, 비용, 기준 수립 후 공개 여부 등이 어떻게 설계되느냐에 따라 신제품 인정 제도가 혁신의 고속도로가 될 수도, 서류만 늘어난 우회로가 될 수도 있다.

품질관리서에서 생년월일 빠지고 ‘번호·시공량’ 들어간다

품질관리 서식도 전면 정비된다. 복합자재·외벽 단열재·방화문·내화구조·자동방화셔터·내화채움구조·방화댐퍼 등 별지 서식 전체가 새 양식으로 교체되는데, 핵심 변화는 두 가지다. 먼저 제조·유통·시공자의 생년월일 기재란을 삭제해 품질관리와 무관한 개인정보 수집을 차단했다. 대신 품질관리서 번호와 시공량 등 이력 추적에 필요한 정보를 새로 추가해, 서류가 아닌 데이터로 자재 이력을 관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자동방화셔터 품질관리서에는 수직·수평 구분, 차열·비차열 성능시간, 슬랫·셔터커튼 규격과 가이드레일 치수 기재란이 유지돼 시공 품질 관리의 정밀도는 그대로 가져간다. 제조업자부터 유통업자, 시공자, 감리자까지 이어지는 서명 체계에 품질관리서 번호가 결합되면, 어느 현장에 어떤 인정 제품이 얼마나 시공됐는지 추적하는 행정의 눈이 한층 밝아진다. 성능 미달 자재의 유통을 걸러내는 그물이 촘촘해지는 것이다.

반도체공장 층간 방화구획도 완화… 같은 날 발표된 ‘규제 합리화 패키지’

함께 입법예고된 「건축법 시행령」 개정안은 반도체공장 설비배관실의 층간 방화구획 기준을 손질했다. 반도체 생산시설은 공정 변경이 잦아 설비배관을 수시로 추가·이동해야 하는데, 그때마다 콘크리트 바닥으로 시공된 층간 방화구획을 철거하고 재시공해야 하는 부담이 컸다. 앞으로는 설비배관 공간을 다른 부분과 방화구획하고 소방청 성능위주설계 평가단의 심의를 거쳐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면 층간 방화구획 설치 의무가 완화된다. 스프링클러가 동등 이상의 화재안전 성능을 확보한다고 판단되는 경우로 요건을 한정해 안전 수준은 유지한다는 설명이다.

정승수 국토부 건축안전과장은 “앞으로도 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적극 반영하여 합리적인 건축제도 개선을 지속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가격 경쟁의 시대는 끝났다… 인정 문호 개방이 부르는 ‘기술 서열’ 재편

그동안 방화셔터 시장의 경쟁 구도는 단순했다. 모두가 같은 기준으로 인정받은 비슷한 제품을 만들었고, 승부는 가격에서 갈렸다. 신제품 품질인정의 문호가 열리면 이 구도가 흔들린다. 남들이 만들지 못하는 제품을 인정받아 출시하는 업체와, 기존 제품의 단가 경쟁에 머무는 업체 사이에 기술 서열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연구개발 여력을 갖춘 업체에게는 격차를 벌릴 기회, 그렇지 못한 업체에게는 존립을 고민할 계기가 될 것이다.

다만 제도의 성패는 아직 백지로 남은 세부 설계에 달려 있다. 자문위원회 심의의 문턱이 지나치게 높으면 대기업만의 리그가 되고, 지나치게 낮으면 검증 안 된 제품에 인정서를 쥐여주는 부실 심사 논란을 부른다. 8월 24일까지인 의견수렴 기간은 업계가 이 균형점 설계에 개입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창구다. 기준이 없어 못 만들었다고 말해온 시간은 끝났다. 이제 기준을 함께 만들자고 말할 시간이다.

출처: 국토교통부 (2026. 7. 15.). 건축물의 피난·방화구조 등의 기준에 관한 규칙 일부개정령안 입법예고 (국토교통부 공고 제2026-928호). 세종: 국토교통부 건축안전과. 의견제출: 통합입법예고센터(opinion.lawmaking.go.kr), 2026. 8. 24. 마감.